비 오는 밤, 낡은 극장에서 우연히 다시 보게 된 한 편의 홍콩 영화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화면 속에서 비가 내리고, 네온사인이 번져 흐르고, 좁은 골목을 천천히 걸어가는 인물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마음 한쪽이 그 도시로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는데, 그때부터 ‘언젠가 저 거리들을 직접 걸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영화 속에서만 보이던 장소를 실제로 만나러 간다는 건, 마치 오래된 꿈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라서 더욱 끌렸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한 가지 여행 계획이 떠올랐습니다. 홍콩 영화가 만들어낸 명장면들의 무대를 따라 걸어보는 여행입니다. 관광지 위주의 여행이 아니라, 영화 속에 숨어 있던 거리와 계단, 배, 야시장 같은 장소들을 하나씩 찾아가 보는 방식입니다. 화려한 쇼핑몰이나 테마파크 대신, 오래된 계단과 소박한 식당, 밤마다 불이 켜지는 간판들이 주인공이 되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홍콩 영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몇 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실제로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장소들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촬영 장소가 바뀌었거나, 가게가 문을 닫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가기보다는 영화의 정서를 살려서 비슷한 분위기의 장소까지 함께 소개해보겠습니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언젠가 직접 걸어가 볼 수 있도록 머릿속 지도를 그린다는 마음으로 읽어도 좋겠습니다.

영화 속 시간으로 들어가는 여행의 느낌

홍콩 영화는 단순한 액션이나 로맨스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의 공기와 사람들의 표정을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특히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시기에는, 작은 골목 하나, 오래된 건물 하나까지도 영화 속에서 중요한 배경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기 작품들을 보고 나면, 인물보다도 도시의 얼굴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여행의 핵심은 “정확한 촬영 장소 하나하나를 모두 찾아야 한다”가 아니라, 영화가 보여준 분위기와 감정을 비슷한 공간에서 다시 느껴보는 데 있습니다. 실제 촬영된 건물이 철거되었거나, 일반인 출입이 막힌 경우도 있어서 똑같이 따라가기가 불가능한 곳도 있습니다. 대신 그 주변 지역이나 비슷한 거리에서 당시의 공기를 상상해보는 방식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해보는 것입니다.

‘화양연화’의 느릿한 골목과 비 내리는 거리

웡가와이 감독의 ‘화양연화’는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이웃집 남녀의 조용한 감정을 따라가는 영화입니다. 화려한 사건이 벌어지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좁은 계단, 좁은 복도, 간신히 두 사람이 마주 지나갈 수 있는 골목 같은 공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영화의 상당 부분은 일반 주택가 내부나 빌딩 계단에서 찍혀서, 정확한 주소를 찾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동네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센트럴과 셩완의 계단, 골목이 주는 느낌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이 자주 오르내리던 계단과 골목은, 실제로는 여러 곳을 섞어서 촬영했습니다. 지금 방문하기 좋은 지역은 홍콩 섬의 센트럴과 셩완 일대입니다. 이 지역에는 경사가 심한 언덕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그 곁으로 오래된 건물과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특히 만모 사원 주변이나 할리우드 로드를 따라 걷다 보면, 자동차 소리가 조금 줄어들고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 천천히 걸으면서, 비라도 살짝 내리는 날이면 영화 속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합니다.

이 일대의 계단과 골목을 걸을 때는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잠시 걸음을 늦추고 주변 소리를 들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바닥의 질감, 습기, 벽에 남은 오래된 페인트까지 눈여겨보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한 시절을 버텨온 동네처럼 느껴집니다.

사라진 식당 대신 남아 있는 정취 찾기

‘화양연화’ 속에서 두 주인공이 식사를 하던 장소로 잘 알려진 골드핀치 레스토랑은, 한동안 영화 팬들의 필수 방문지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 레스토랑은 문을 닫았다가 다시 문을 열기도 했고, 운영 상황이 여러 번 변했습니다. 지금은 예전 영화 속 모습과는 다르게 변했거나, 완전히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특정 식당을 찾아가 “정확히 이곳”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코즈웨이 베이나 완차이 일대에 남아 있는 오래된 서양식 또는 다이닝 레스토랑을 찾아보는 편이 더 현실적입니다.

조명이 약간 어둡고, 부스 형태의 좌석이 있는 식당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하다 보면, 영화 속 인물들이 했던 대화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같은 메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조도와 비슷한 속도의 시간을 체험해 보는 데 있습니다.

네온 간판이 켜지는 밤거리

영화에서 비 오는 밤거리에 비친 네온사인은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예전처럼 대형 네온 간판이 도시에 가득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남아 있습니다.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과 몽콕의 번화한 거리에서는 간판과 불빛, 사람들의 말소리가 서로 얽혀 독특한 야경을 만들어 냅니다. 노점에서 밥을 먹고, 상점 사이로 난 골목을 지나가다 보면 영화 속에서 보았던 “화려하지만 어딘가 쓸쓸한 밤”이 왜 그렇게 인상 깊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경삼림’과 미로 같은 도시의 리듬

‘중경삼림’은 빠르게 변하는 도시 속에서 사람들의 외로움과 우연한 만남을 다룹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된 공간들은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혼잡하면서도 이상하게 포근한 느낌을 줍니다. 움직이는 카메라, 흐릿한 불빛, 속도감 있는 편집 때문에 실제로 그 장소를 걸어보면 화면에서 느꼈던 것과 또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주변의 골목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언덕 위 주거 지역과 도심을 이어주는 긴 야외 에스컬레이터입니다. 영화에서처럼 누군가를 몰래 바라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혼자 이동하는 사람들을 상상해보면,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작은 무대처럼 느껴집니다. 에스컬레이터 주변에는 카페, 작은 식당, 바 같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어 낮과 밤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릅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아래로 이동하다가 마음에 드는 거리나 계단이 보이면 내려서 잠시 걸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어떤 구간에서는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사람들의 대화가 섞여, 영화 속 배경음악처럼 들리곤 합니다.

청킹맨션의 복잡한 입구

‘중경삼림’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뒤섞인 복잡한 건물 안과 그 주변 거리입니다. 실제로 침사추이에 있는 청킹맨션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건물로 유명합니다. 내부는 좁고 복잡하며, 작은 식당과 가게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처음 가는 사람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이곳은 건물 안쪽까지 깊게 들어가기보다는, 입구 주변과 외관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사람들의 표정, 벽에 붙은 각종 안내문, 좁은 통로를 오가는 카트들을 보고 있으면, 한 도시 안에도 서로 다른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가상의 가게에서 현실 거리로 옮겨 온 장면들

영화 속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같은 가게는 실제로 존재하는 한 곳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여러 노점과 작은 음식점을 합쳐 놓은 듯한 느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다면 란콰이퐁, 소호, 센트럴의 작은 골목을 천천히 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늦은 밤까지 문을 여는 작은 가게, 길가에 놓인 테이블, 포장마차에서 파는 간단한 음식들이 영화 속 풍경과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특정 장소 하나를 찾아다니기보다는, 그 영화 속 인물처럼 캔 음료를 하나 들고 천천히 걸어보면서 주변을 바라보면,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세트장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무간도’와 도시 위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선

‘무간도’는 경찰과 조직의 첩자로 살아가는 두 남자의 이야기로,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이 홍콩 곳곳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실제 촬영에 사용된 건물 옥상이나 사무실은 대부분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렵지만, 그 주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정서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침사추이 일대의 빌딩 숲과 해변 산책로

영화의 중요한 장면 중에는 높은 옥상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정확히 같은 옥상에 올라갈 수는 없지만, 침사추이 해변 산책로에서 바라보는 홍콩 섬의 스카이라인은 그 자체로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낮에는 건물의 윤곽이 또렷이 보이고, 밤에는 불빛만이 떠 있는 듯한 풍경을 보여줍니다.

이곳을 걷다 보면, 영화 속 인물들이 했던 선택과 갈등이 단순한 범죄 이야기 이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시의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복잡하다는 느낌이 풍경과 함께 전해집니다.

스타 페리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간격

스타 페리는 홍콩 섬과 구룡 반도를 오가는 배로,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일상과 함께해 온 교통수단입니다. ‘무간도’뿐 아니라 많은 영화에서 중요한 만남과 대화의 장소로 등장하곤 했습니다. 배를 타고 빅토리아 하버를 건너는 동안, 양쪽 도시의 건물들이 천천히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배 안에서 난간에 기대어 바람을 맞다 보면, 이곳을 오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과 이야기가 겹쳐 보입니다. 누구는 출근길에, 누구는 이별 후에, 누구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러 이 배를 타고 건너갔을지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서사가 만들어집니다.

‘영웅본색’과 빅토리아 하버의 비장한 풍경

존 우 감독의 ‘영웅본색’은 의리와 배신, 형제애를 다룬 영화로,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총격 장면만큼이나, 인물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장면이 인상 깊게 남습니다. 그 장면들 속 홍콩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 장소처럼 느껴집니다.

빅토리아 하버가 품고 있는 이미지

빅토리아 하버는 홍콩을 상징하는 바다로, 수많은 영화에서 배경으로 등장했습니다. ‘영웅본색’에서도 인물들의 중요한 대화나 결심이 이 바다를 곁에 두고 펼쳐집니다. 침사추이 해변 산책로에서 바라보는 건물과 바다, 그리고 반대편 센트럴 피어 근처에서 보는 풍경은 조금씩 다른 느낌을 줍니다.

낮에는 평범한 도시 풍경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해가 지고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면, 차분한 색감의 영화 장면처럼 도시 전체의 톤이 바뀝니다. 이때 가만히 앉아 바다를 보고 있으면, 영화의 주인공들이 했던 대사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묵직한 기분이 자연스럽게 찾아오기도 합니다.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에서 느껴지는 거친 온도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은 판자와 천막, 작은 상점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야시장입니다. 길 양쪽으로 음식, 옷, 기념품 등을 파는 가게가 이어지고, 사람들의 목소리와 조리 도구 부딪히는 소리가 쉼 없이 이어집니다. 이런 분위기는 ‘영웅본색’뿐 아니라 여러 느와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거칠지만 활기가 넘치는 뒷골목의 이미지와 잘 겹칩니다.

이곳에서는 일부러 무엇을 사거나 먹지 않더라도, 그냥 천천히 한 번 끝까지 걸어 내려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좁은 통로, 머리 위로 늘어진 전선, 간판의 불빛, 노점에 걸린 옷들까지 모두 하나의 거대한 세트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영화 속에서 총을 든 인물이 이 길을 뛰어 내려갈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영화 촬영지 여행을 준비할 때 생각해볼 것들

이런 식의 여행을 계획할 때는, 단순한 “방문 목록”을 만드는 것보다 “어떤 감정을 느끼고 싶은지”를 먼저 떠올려 보는 편이 도움이 됩니다. 이를 위해 미리 준비하면 좋은 것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영화를 미리 다시 보기: 여행 전에 보고 싶은 작품을 한두 편 골라 다시 보면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장소와 장면을 메모해두면 나중에 현장에서 떠올리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 대중교통 익숙해지기: 홍콩의 지하철(MTR)과 버스, 트램은 도시 곳곳을 연결해줍니다. 지하철 노선도와, 트램이 다니는 길 정도는 미리 살펴보면 이동 시간이 줄어듭니다.
  • 걷는 시간을 충분히 잡기: 촬영지라고 표시된 곳만 찍고 바로 떠나기보다는, 그 주변 골목도 함께 걸어보는 게 좋습니다. 영화 속 분위기는 종종 거리 전체에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사진과 영상 남기기: 예전 영화 장면의 스틸 컷을 휴대전화에 저장해 두고, 비슷한 구도로 사진을 찍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입니다. 같은 장소라도 시간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 배경음악 준비하기: 이동할 때 영화의 주제가나 사운드트랙을 들어보면, 평범한 거리도 조금은 다르게 보입니다. 이어폰으로 조용히 듣고 있으면, 주변 소리와 음악이 섞이면서 색다른 느낌을 줍니다.
  • 일정에 여유 두기: 모든 장면의 장소를 완벽하게 찾으려다가 지치기 쉽습니다. 특히 실제 촬영 장소가 바뀌었거나 사라진 곳도 있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몇 구역만 골라 깊게 둘러보는 편이 훨씬 만족도가 높습니다.
  • 현지 음식과 함께 기억 만들기: 촬영지 근처의 작은 식당이나 노점에서 간단한 음식을 사 먹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됩니다. 무엇을 먹었는지보다, 어떤 풍경을 보며 먹었는지가 나중에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홍콩 영화 속 장소를 따라가는 여정은, 결국 영화를 다시 보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면으로만 보던 도시의 온도와 습기, 사람들의 말투와 속도, 밤공기의 냄새까지 직접 느껴보는 순간, 오래전에 봤던 장면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곤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뒤, 같은 영화를 다시 틀었을 때, 그 장면 한가운데를 실제로 걸어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화면 속 세상이 조금 더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집니다.